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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간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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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간은 후한 말의 인물로, 원소 휘하에서 기주를 다스리던 한복을 협박하여 기주를 원소에게 넘기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병주 자사로 임명되어 약 7년간 통치했으나, 조조에게 항복했다가 반란을 일으켜 호관을 지키다 조조에게 패하여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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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간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고간
본명고간
로마자 표기Go Gan
원재 (元才)
출생지기현
사망206년
직업군벌
소속후한
가족 관계
할아버지고자
아버지고공
삼촌원소
조카고유
관직
역임병주자사

2. 생애

고간은 진류군 (陳留郡) 위현 (圉縣, 현재 허난성 카이펑시 치현 부근)의 유력 가문 출신으로, 원소의 외조카였다. 190년대부터 202년 원소가 사망할 때까지, 고간은 원소 휘하에서 중국 북부 4개 주 중 하나인 병주자사를 맡아 약 7년간 다스렸다.[2]

초평 2년(191년), 순심, 신평, 곽도, 장도와 함께 원소의 사자로 파견되어 기주를 다스리던 한복을 협박하여 기주를 넘겨받게 하였다. 194년에는 7촌 조카 고유를 불러 하북으로 오게 하였고, 원소는 그를 병주자사에 임명하였다.

200년, 원소는 관도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했다. 원소의 패배 이후, 병주에서 고간이 지휘하던 병력은 약 5만 명으로, 원소 군대 중 가장 조직적이고 사기가 높았다.

202년 원소가 죽자, 고간은 곽원과 남흉노 지도자 호주천의 지원을 받아 조조에 맞섰으나, 곽원이 종요에게 패하고 호주천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병주로 돌아왔다. 203년, 원소의 아들 원담원상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조조에게 항복했고, 조조는 그를 계속 병주자사로 있게 했다.

205년, 조조가 오환과 원상을 공격하러 간 사이 고간은 반란을 일으켜 상당군 태수를 인질로 잡고 호관 (壺關, 현재 산시성 루청시 서쪽)을 방어했다. 이전악진이 호관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206년, 조조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자 고간은 흉노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으나 거절당했다. 호관이 함락되자 형주유표에게 가던 중 왕염에게 붙잡혀 죽었다.

2. 1. 원소 휘하

초평 2년(191년), 원소는 순심, 신평, 곽도, 장도를 사자로 보내 기주를 다스리던 한복을 협박했다. 한복은 반대의견을 무릅쓰고 기주를 원소에게 넘겨주었다.[2] 194년에는 7촌 조카 고유를 불러 하북으로 오게 하였고, 원소는 그를 병주자사에 임명하였다.

건안 7년(202년) 원소가 죽고 원상이 뒤를 이은 후 조조가 공격해 왔다. 원상은 자신의 부하 곽원을 보내 하동군을 공격하게 하고, 남흉노의 선우 호주천과 고간에게 지원하게 했다. 그러나 곽원이 종요에게 패해 죽고, 호주천이 조조군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고간은 병주로 돌아왔다.

건안 9년(204년), 원상이 조조에게 패하자 원상에게서 고간의 감찰역으로 파견 와 있던 견초는 원상을 도울 것을 권했다. 그러나 고간은 원상의 위기를 틈타 자립을 계획하고 있었으므로 은밀히 견초를 죽이려고 했다. 이를 알아챈 견초는 황급히 달아났다. 심배가 지키던 이 함락당할 때, 고간 역시 독자적으로 업을 공격해 함락시키려고 했으나 업성 내부에서의 내응이 탄로나 내응자들이 철저히 주살되었다.

2. 2. 원소 사후

건안 7년(202년) 원소가 죽고 원상이 뒤를 이었다. 조조가 공격해 오자, 원상곽원을 보내 하동군을 공격하게 하고, 남흉노의 선우 호주천과 고간에게 지원하게 했다.[2] 그러나 곽원종요에게 패해 죽고, 호주천이 조조군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고간은 병주로 돌아왔다.

건안 9년(204년), 원상조조에게 패했다. 이때 원상에게서 고간의 감찰역으로 파견와 있던 견초는 원상을 도울 것을 권했지만, 고간은 원상의 위기를 틈타 자립을 계획하고 있었으므로 은밀히 견초를 죽이려고 했다. 이를 알아챈 견초는 황급히 달아났다. 심배가 지키던 이 함락당할 때, 고간 역시 독자적으로 업을 공격해 함락시키려고 했으나 업성 내부에서의 내응이 탄로나 내응자들이 주살되었다. 조조와의 정면 대결을 피했던 고간은 그대로 조조에게 항복하였고, 조조는 항복을 받아들여 예전처럼 병주를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원상원희가 오환으로 달아난 후 조조의 시선이 오환에게 쏠리자, 고간은 이듬해 10월에 반기를 들고 호관(壺關)을 지켰다. 또 하동의 관리 위고(衛固)와 내통하여 하동을 장악하려 하였으며, 조조가 보낸 하동태수 두기를 공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건안 11년(206년) 1월, 조조가 직접 공격해 오자, 고간은 부하에게 호관을 지키게 하고, 직접 흉노로 가 호주천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3월에 호관이 함락되자 남쪽으로 달아나던 중 상락도위(上洛都尉) 왕염(王琰)에게 붙잡혀 죽었다.

2. 3. 조조에 대한 반역과 최후

건안 7년(202년) 원소가 죽고 원상이 뒤를 이었다. 이후 조조가 공격해 오자, 원상곽원을 보내 하동군을 공격하게 하고, 남흉노의 선우 호주천과 고간에게 지원하게 했다.[2] 그러나 곽원종요에게 패해 죽고, 호주천이 조조군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고간은 병주로 돌아왔다.

건안 9년(204년), 원상조조에게 패하자 고간은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조조는 항복을 받아들이고 고간이 예전처럼 병주를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원상원희가 오환으로 달아난 후 조조의 시선이 오환에게 쏠리자, 고간은 이듬해 10월에 반기를 들고 호관(壺關)을 지켰다. 또 하동의 관리 위고와 내통하여 하동을 장악하려 하였으며, 조조가 보낸 하동태수 두기를 공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건안 11년(206년) 1월, 조조가 직접 공격해 오자, 고간은 부하에게 호관을 지키게 하며, 직접 흉노로 가 호주천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3월에 호관이 함락당하자 고간은 남쪽으로 달아나던 중 상락도위(上洛都尉) 왕염(王琰)에게 붙잡혀 죽었다.

3. 일화

고간은 본디 명성을 얻는 것을 귀하게 여겼으므로 각지의 선비들과 어울려 사귀었고 전란으로 인해 생긴 유사들을 불러 모았는데, 이로 인해 고간에게 수많은 선비들이 귀의하였다.[1] 중장통은 병주를 지날 때 고간을 만나 후한 대접을 받았다.[1] 중장통은 고간이 거대한 포부가 있으되 거대한 재능은 없으며 선비를 경애하면서도 스스로를 높이 여기는 성품 때문에 사람을 가려 쓸 줄 모르는 점에 대해 충고하였으나 자신의 재능을 과신하고 있던 고간은 귀담아듣지 않았다고 한다.[1]

사승의 『후한서』에 따르면, 고간은 원소의 조카였지만 재능과 야심에 넘치고 문무에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하며, 단순한 연고만으로 출세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2] 고간은 많은 선비를 초빙하여 귀속시켰지만, 그중 중장통은 고간에게 자신 과잉적인 면이 있다고 보았다.[2] 그는 고간의 초청에 응하여 그를 찾아갔을 때 "당신은 웅대한 뜻을 가지고 있지만, 웅재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또한 선비를 좋아하지만, 선비를 선택하지 못합니다."라고 충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섬기지 않고 떠났다.[2]

고간은 두 번이나 조조 진영의 배후를 공격하여 위기에 빠뜨렸으며, 건안 7년(202년)의 하동군 진공과 건안 10년(205년)의 상당군 반역 모두 사전 준비가 철저했다. 그러나, 조조의 후방에 자리 잡고 있던 인재층 또한 상당했기에, 고간의 야심 실현은 좌절되었다.

4. 《삼국지연의》 속 고간

원소가 창정(倉亭)에서 조조와 싸울 때 병주의 군사 6만 명을 이끌고 합류했다. 패주하는 원소를 호위하다가 화살을 맞았으며, 여양(黎陽)에서도 원담원상을 도와 조조군과 싸웠다. 조조에게 항복했던 일은 나와 있지 않으며, 호관을 지키던 중 조조에게 항복한 장수 여광여상의 거짓 귀순에 속아 야습을 시도했다가 패하고 관을 빼앗기는 것으로 나온다.[1]

삼국지연의에서는 정사에서의 활약에 비해 상당히 미미한 역할로 묘사된다. 사서처럼 관서 지역을 공격하거나, 일시적으로 항복했다가 다시 반기를 드는 과정이 완전히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상당에서 조조군을 상대로 필사적으로 방어전을 펼쳤지만, 조조에게 투항한 여광여상의 거짓 항복에 속아 패배하고, 최후는 사서와 동일하게 묘사된다. 여광과 여상은 사서에서는 고간과 아무런 접점이 없다.[1]

5. 고간의 친족관계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고간의 친족관계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 작성할 내용이 없습니다.

참조

[1] 서적 魏志 高柔伝
[2]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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